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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바투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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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년. 호라즘 제국의 도시 오트라르의 영주는 동북쪽에서 온 한 나라의 대상들의 재물을 탐내 그들을 몰살시켰다. 그 나라는 곧장 항의 사절단을 보냈지만 그 사절단은 호라즘의 샤 무하마드에게 온갖 모욕만을 당하고 되돌아왔다.(1) 중앙아시아를 백년간 호령했던 이교도들인 서요를 꺾고, 바그다드를 위협하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평정한 무하마드로써는 동북쪽의 낯선 나라의 요구 따위는 무시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하마드의 생각은 틀렸다. 하필 그 나라의 이름은 몽골이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칭기즈칸이었다.


 - 누구든 우리 몽골을 건드리면 X되는 거예요. 아주 X되는거야." -

 금과 서하를 꺾으며 한창 그 기세를 뽐내던 몽골은 바로 호라즘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개시했다. 우르겐치가 불탔다. 사마르칸트가 불탔다. 타슈켄트도 불탔다. 오트라르야 당연히 쑥대밭이 되었고, 메르브, 니샤푸르 등 호라즘 제국에 속해있던 거의 모든 도시가 불타버렸다. 칭기즈칸은 부하라에서 곧 살육될 부하라의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자신들은 호라즘을 벌하기 위해 온 신의 채찍이라고 말했지만 곧 죽을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악마의 군대였다.

 - "나는 신의 채찍이다. 고로 너희들을 죽여야겠다." -

 한때 오만하게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칼리프직을 양위하라고 협박을 했던 무하마드는 이제 이 무시무시한 자들을 피해 도망치기 바쁠 뿐이었다. 칭기즈칸은 그의 신뢰할만한 장군인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2만의 군대를 딸려보내 무하마드를 잡아오게 했다. 하지만 추격대가 북부 페르시아를 휩쓸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무하마드는 카스피해의 한 섬으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죽었다는 것이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이후 칭기즈칸의 전갈을 받게 된다. 약간의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칭기즈칸의 명령은 카스피해 북쪽으로 돌아 본대와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1222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2만의 군대는 카프카스로 진군, 조지아 왕국군을 격파한 뒤 카프카스 산맥을 넘었다. 중간에 산민들과 쿠만족의 연합군에게 포위되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뇌물로 쿠만 군대를 후퇴시킨 후 제베와 수부타이는 산민들과 쿠만족을 각개격파했다. 그리고 스텝 지대를 마음대로 휩쓸기 시작했다.

 쿠만족은 그동안 자신들이 털어먹기도 하고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맺기도 했던 러시아 공국들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오늘은 우리가 당했지만, 내일은 너희들이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러시아 공국들은 이 충고를 받아들여 몽골족과 싸우기 위해 진군했다. 연합군은 칼카강에서 몽골군과 격돌했다. 서전에서 러시아 공국은 몽골군을 안심시킨 뒤 기습하여 천여명의 병력을 몰살시켰지만 이후 몽골 중기병대의 돌격으로 쿠만족 군대는 패퇴하고, 러시아 공국 군대는 언덕에서 3일간 고립되었다가 몽골측의 안전 보장 약속만 믿고 후퇴하다가 전멸하였다. 대략 3만의 병력이 이 전투에서 증발하였다. 이는 상당한 손실이었다.

 - 몽골 입장에서는 지나가다 한대 툭 친 것이지만 러시아 공국들과 쿠만족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

 이후 제베와 수부타이는 후퇴하다가 사마라 만곡에서 볼가 불가르와 모르도바인의 연합군과 격돌했다. 양쪽 모두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적어도 볼가 불가르는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선전했다. 그리고 한동안 스텝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폭풍전야의 고요였을 뿐이라는 것이 1236년에 드러났다.

 <러시아는 불타고 있습니다.>

 1229년. 오고타이 칸은 약간의 병력을 보내 볼가 불가르를 공격했다. 볼가 불가르는 이 공격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우랄 산맥 일대를 상실했다. 하지만 볼가 불가르는 당장 멸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공격은 어디까지나 정찰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1236년. 오고타이 칸은 자신의 조카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훗날 칸이 되는 자신의 아들 구유크와 톨루이의 아들 몽케, 그 외에도 베르케, 카이두, 바이다르 등 수많은 몽골 왕족들과 백전 노장이며 사준사구의 일원 수부타이가 포함된 유럽 원정군을 출진시켰다. 몽골측의 병력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보조군까지 포함한다면 7만~15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일단 총 사령관은 바투였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수부타이가 맡았다.

 첫 목표물은 볼가 불가르였다. 볼가 불가르의 수도인 빌라는 1236년에 함락되었고, 빌라성 주민들과 군대는 모조리 몽골군에게 학살당했다. 되로 주고 트럭으로 받은 셈이었다. 그렇게 볼가 불가르는 멸망했다.

 - "자! 다음 희생자는 누구냐?" -

 다음 목표물은 쿠만족이었다. 쿠만족은 몽골에게 패배했고 다수는 살육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나마 저항하던 바치만이란 수령도 얼마 안 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붙잡힌 포로 중 일부는 노예군인으로 아랍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몇몇 생존자들은 유럽, 특히 헝가리로 도주했다. 바투는 이미 자신들이 오기 전부터 쿠만족이 헝가리에 귀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볼가 불가르를 공격할 때 만났던 헝가리 수도사 율리아누스에게 쿠만족을 받아들인다면 헝가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주어 헝가리로 돌려보냈다. 물론 헝가리는 무시하고 1239년에 쿠만족들을 받아들였다.

 볼가 불가르와 쿠만족을 박살낸 몽골군은 이제 러시아 공국들을 공격했다. 1237년. 몽골군은 러시아 공국들 중 가장 강력했던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의 대공 유리 2세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부되자 라쟌을 공격했다. 랴잔을 지키던 유리, 로만 형제는 랴잔과 콜롬나에서 농성했다. 하지만 1237년 12월 12일. 공성을 시작한 지 5일만에 라쟌은 함락되었다. 주민들은 교회로 피난했지만 몽골군은 교회에도 불을 질렀고,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얼마 안 가 콜롬나와 모스크바도 같은 꼴을 당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지원군을 파견했지만 지원군도 몰살당했다. 결국 유리 2세는 시트 강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가 시트 강에서 결전을 벌이기 위해 떠난 사이 몽골군은 블라디미르 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도 공격했고, 블라디미르 역시 함락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유리 2세 역시 1238년 3월. 시트강에서 몽골군과 격돌했지만 러시아 공국들의 군대는 전멸했고, 유리 자신 역시 전사했다.

 - "이건 뭐. 상대도 안 되는구만. 한주먹거리도 안 되네." -

 몽골군대는 거칠것 없이 러시아 공국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로스토프, 우글리치, 트베르등을 쓸어버렸고 북부 러시아에서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남아있는 유일한 도시 노보고로드도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노보고로드를 공격하려다가 후퇴했다.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노보고로드 군대가 몽골군을 격파한 것인가? 아니었다. 노보고로드를 구원한 것은 바로 봄(春)장군이었다. 몽골군이 토로츠크라는 도시에서 예상밖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 봄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몽골이 토로츠크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노보고로드로 진군할 때 땅이 녹아서 뻘밭.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

 그렇게 노보고로드는 구원받았다. 러시아 사에서 겨울이 아닌 봄이 그들을 구원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노보고로드 역시 몽골의 무서움을 잘 알았기에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마저도 몽골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였다.

 이후 몽골군은 남쪽을 이동했다. 이들은 북부 카프카스로 이동한 후 한동안 북부 카프카스 공략에 집중했다. 알라니아 왕국이 멸망했고, 제베와 수부타이를 1221년에 골탕먹였던 산민들의 마을들은 구유크의 군대에 의해 쑥밭이 되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과거 다랄스키 협곡에서 2만명이 통째로 전멸당할뻔했던 아찔한 기억때문에 산악지역까지는 공격하지 못했다. 대신 평야지대에 있던 산민들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1239년에는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남부 러시아가 주 목표였다. 체르니코프와 페레야슬라브를 시작으로 남부 러시아 지역이 몽골에게 점령당했고, 1240년 12월에는 키예프마저 함락당했고 키예프는 완전히 쑥밭이 되어버렸다.(2) 이후 갈리시아 공국 역시 몽골족에게 공격당했고, 다니엘로 대공은 헝가리로 도주했다.(3)

 - "아... 이제 유서깊은 키예프도 여기가 마지막이구나.." -

 이로써 러시아 공국들은 모두 몽골족에 의해 멸망하거나 복속,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몽골족은 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러시아 공국들을 지배하며 타타르의 멍에를 그들에게 씌웠다. 

 <충격과 공포>

 몽골의 다음 공격 목표는 폴란드였다. 당시 폴란드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마조비아 등 여러개의 공국들로 나뉘어져 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는 당연히 몽골군을 막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1241년 2월.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의 분대는 아직 얼어붙은 비스툴라강을 넘었고 3월에는 츠미엘니크에서 폴란드 공국들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크라코프까지 진격했다. 크라코프의 통치자와 시민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도주했고, 몽골군은 크라코프를 불태운 후 슐레지엔 공국으로 진격했다. 

 - "가자! 슐레지엔으로!" -

 슐레지엔 대공 헨리크(4)는 보헤미아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 그리고 튜튼기사단(5)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모은 병력은 대략 7천~2만. 바이다르의 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다만 유럽 제후들의 연합군은 그다지 잘 조직된 편이 아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금광 등에서 일하던 광부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래도 광부들로 구성된 보병대는 몇몇 기록들을 신뢰하자면 초반에는 나름대로 몽골군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몽골군의 측면 공격으로 이 부대는 괴멸되었고, 2진과 3진은 몽골군을 상대로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몽골군 진영에서 폴란드어로 "돌아가! 돌아가!" 하는 말이 들리자 몽골측의 계략을 의심하고 후퇴하다가 전멸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슐레지엔의 군대는 석궁 등으로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몽골의 최후 예비대가 투입되자, 결국 괴멸되었고, 슐레지엔 대공 헨리크는 전사했다. 이후 바이다르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휩쓸었지만 올뮈츠성은 강력한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헝가리로 합류했다.


 -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짓밟아주마!" -
 
 한편 몽골의 주력군대는 바르다이가 폴란드를 휩쓸 때 쿠만족을 받아들인 헝가리를 향해 진격했다.(6) 이들은 3개 부대로 나누었는데 샤이바니의 군대는 폴란드 방향에서, 바투는 갈리시아에서 카르피타아 방면에서, 카다얀은 몰다비아 방면에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들이 헝가리 수도 페스트 인근에서 합류하자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2만여명의 병력을 모아 사요강으로 진격했다. 몽골측의 병력은 3만~5만. 그리고 사요강 전투, 혹은 모히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헝가리군의 군세가 강한 것을 본 바투 등은 전투를 망설였다. 하지만 수부타이는 병력을 5개 부대로 나누어 따로따로 도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방법을 위해서는 시기 조절이 필수적이었는데, 하필 바투의 본대가 너무 빨리 강을 건너버렸다. 헝가리군은 이틈에 강을 건너는 몽골군 선발대를 격파하고 소규모 병력을 사요강 다리에 배치한 채 뒤로 물러났다.

 - "예상외로 적이 만만치가 않구나." -

 상황이 꼬여버린 걸 안 바투의 군대가 다시 공격하자, 몽골군은 도하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났던 헝가리군이 다시 공세로 전환하면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몽골군은 바투가 직접 적을 베고, 그의 측근이 전사할만큼 힘든 난전을 강요받는 처지가 되었다. 마침 헝가리군이 너무 깊다며 미처 경계하지 않던 곳을 뗏목으로 건넌 수부타이의 군대가 헝가리군을 급습하면서 헝가리군은 패퇴했고, 몽골군은 힘겹게 승리할 수 있었다.(7)

 이후 몽골군은 페스트를 함락시키고, 헝가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은 빈 근처까지 진격하기도 했지만 여름과 가을 내내 헝가리의 평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 때 몽골은 교활한 술책을 썼다. 몽골군은 사면령을 발표하여 주민들을 집으로 돌아와 수확을 하게 하고는 그 뒤에 모조리 죽여버리는가 하면, 요새를 공격할 때 포로들을 화살받이로 앞으로 내몰고, 탈취한 벨라 4세의 옥새로 저항하지 말라는 위조 포고문을 뿌리고, 화폐를 주조하는 등 사실상 헝가리를 몽골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로 도망간 벨라 4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몽골은 1242년 추격대를 보내 헝가리와 동군연합상태였던 크로아티아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들은 벨라 4세를 붙잡지 못했다.

File:Kk ivb.jpg

 - "나 벨라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굴복이란 내 사전에 없다!" -

 이 때 몽골군 수뇌부는 분열되어있었다. 바투 등이 보여준 몇몇 능력이 의심되는 행동에 구유크 등 일부 몽골 왕족들은 바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바투와 구유크는 자주 다투었고, 결국 이 사정을 전해 들은 오고타이는 구유크를 소환했다. 구유크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던 1241년 겨울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8)

 이 소식은 헝가리에 머물던 바투에게 해를 넘겨서야 도착했다. 몽골군 수뇌부는 계승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후퇴했다. 특히나 바투로써는 자신과 사이가 나쁜 구유크가 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상 서둘러 자신의 세력권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몽골군은 자신들이 돌아가는 길에 저항하는 지역들을 짓밟아버리며 흑해로 후퇴했고, 벨라 4세는 헝가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때의 피해로 헝가리는 독일, 왈라키아, 프랑스 등에서 이민자들을 유치하며 인구를 보충해야 했다.

 <몽골은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꽤나 위험한 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번 다뤄보지 않을 수도 없는 주제이므로 한 번 다뤄볼만한 것이 바로 몽골군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이다.

 일단 간단하게 말한다면, 원정이 지속되었다면 몽골군이 서유럽을 지속적으로 약탈하는 약탈 원정의 기반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을 것이다. 사실 몽골군이 유럽에 가져다준 공포는 대단한 수준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주 상대는 분열되어있던 폴란드나 러시아였다. 당장 몽골군대는 국가체계가 나름대로 잡혀있던 헝가리군을 상대로는 나름대로 고전한 편이었다. 그리고 아직 유럽에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영국이 건재했다. 

 또 다른 문제는 지형이다. 동유럽. 즉 그들이 주로 전쟁을 벌였던 지역들은 산이나 언덕이 없고 성채도 드문드문 흩어져있던 드넓은 평야지대로써 몽골의 장점인 기동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지형이었다. 하지만 독일만 되도 당시 서유럽은 숲과 언덕, 농경지, 여러개의 요새와 성채가 넘쳐나던 곳이었고 이런 곳에서 몽골군은 기동성을 살리기 힘들었다. 특히나 요새나 성채는 몽골의 전략적 기동성을 상당부분 깎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전면적인 난전을 강요당했던 모히강 전투에서 몽골군이 꽤나 고전했다는 점을 고려해볼때 그들이 서유럽을 침공했다면 제2, 제3의 모히 전투가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고, 이 경우 패배조차 고려해야 했다. 

File:Swiss National Park 131.JPG

 - 당장 독일만 해도 이런 숲이 당시까지 상당히 많았다. -

 무엇보다 서유럽의 기사들은 생각외로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세력들에게 정면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은 상대로 각인될 만큼 상당한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이슬람세력들이 이들을 흉내내게 만든 전례가 있었다. 그만큼 전투력을 인정받은 그들을 상대로 기동성이 제한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다. 실제로 헝가리는 군대를 더욱 중장화하고 자신들의 영토를 성채로 도배시킨 결과 1280년대 몽골의 재침공 때 몽골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굳이 가능한 상황은 몽골이 모든 국력을 기울여 유럽 원정에 나서는 것인데 고려, 중국, 중동 등 여러 지역을 한번에 공략하던 몽골에게 그럴 여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정황상 몽골군이 서유럽에서 대패하지 않는다면 헝가리나 폴란드 역시 그들의 영역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 몽골은 훈족이나 아바르, 마자르가 그랬듯이 무자비하고 잔혹한 약탈원정을 유럽을 상대로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의 결말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데, 기세가 꺾이는 순간 바로 서유럽의 강력한 보복 혹은 내부 반란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이래저래 몽골이 유럽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이들이 보여준 잔혹함과 잔인함 등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몽골의 영향>

 어찌 됬든 몽골이 유럽을 공포에 떨었다지만 생각외로 그들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들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후퇴했고, 덕분에 헝가리와 폴란드는 원상복귀 될 수 있었다. 굳이 따지면 헝가리는 인구 부족에 시달려서 독일, 프랑스, 거기에 왈라키아 이주민들까지 받아들이며 인구 회복에 전념해야 하기는 했지만... 물론 정신적 충격은 컸기에 교황청과 프랑스 등은 사절단을 보내며 몽골과 친하게 지내는 한편 몽골 칸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칸의 개종은 실패했지만 종교에는 관대했던 몽골인들의 성향 덕에 이들은 몽골제국의 영토 내에서 선교를 할 수 있었다.

 - 구유크 칸이 교황에게 보낸 답신 -

 그러나 러시아 입장은 달랐다. 수많은 공국들이 쑥대밭이 됬고, 키예프 공국은 아예 멸망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러시아 공국들은 이제 타타르의 멍에를 쓰며, 사라이에 아부하고 과중한 세금을 내야했다. 아부하지 않거나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몽골군이 들이닥쳐서 도시를 불태우고 대공을 죽여버릴 것이 뻔했다. 몇 차례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몽골에게 사뿐히 즈려밟혔다. 러시아의 대공들은 생존을 위해 몽골에 아부해야했고, 심지어 스웨덴과 튜튼기사단을 물리쳤던 알렉산드르 네프시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File:Alexander Nevsky 2.jpg

 - "그럼 어떻해? 나도 살아야지. 저들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나도, 노보고로드도 모두 사라진다고!" -
 
 다만 몽골은 거점을 볼가강 유역에 두었고, 이로 인해 벨로루시나 우크리이나 일대의 통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몽골의 힘때문에 러시아 공국들은 여전히 사라이에 머리를 조아려야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북서쪽의 리투아니아였다.

 아직 뇌신 페룬으로 상징되는 토착 다신교를 신봉하던 리투아니아는 마침 절묘하게도 13세기 무렵. 부족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는 리투아니아에게 매우 행운이었는데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리보니아와 달리 독일인들이나 덴마크인들에게 짓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곧 독일인들과의 항쟁을 의미하였다. 리투아니아는 튜튼기사단과 싸우기 시작하는 한편, 이들에 맞서 싸울 힘을 키우기 위해 확장해야 했다. 하지만 튜튼기사단 영토를 점령하는건 무리였고, 그렇다고 그들과 일단 우호관계인 폴란드를 공격하는것도 부담이 컸다. 하지만 몽골의 침공으로 벨로루시 일대는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나 다름이 없었고, 우크라이나 역시 몽골의 통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튜튼기사단과 싸우는 동안 예전에는 러시아 공국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힘의 공백지대가 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를 야금야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File:Lithuanian state in 13-15th centuries.png
 
 - "땅 비었다. 땅 비었네. 오늘도 땅따먹자. 먹고 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리투아니아의 하루" -

 <제국의 실권자 바투>

  한편 볼가강 일대로 후퇴한 바투는 몽골로 귀환하지 않고 봄에는 볼가강 상류에 있다가 8월 경 볼가강 하류, 정확히 말해서 하자르의 수도 이틸이 있던 자리 근처에 있는 자신의 거점을 왕복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거점은 훗날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가 되었다. 한편 바투의 형 오르다는 현재의 카자흐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킵차크 한국에 소속된 백장한국이었다. 

 바투는 어떻게든지 구유크가 칸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섭정인 태후 투르게네나 구유크는 끝내 쿠릴타이를 소집시키는 데 성공했고 바투는 불참했다. 일단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가 칸이 되는 것은 정통성에 문제가 없었기에 바투로써는 긍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속은 떨떠름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구유크도 그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구유크는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된 후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바투를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248년. 바투와 구유크는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바투의 군대는 동진했고, 구유크의 군대는 서진했다. 양쪽의 충돌이 임박해보였다.

파일:YuanEmperorAlbumGüyükPortrait1.jpg
 
 "야 이 바투 반란구노무 새끼야. 니 거기서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군대를 몰고 가서 니놈들의 머리통을 확 날려버리겠어! 역적노무 새끼들!" -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구유크가 급서했다. 이후 구유크의 아내 오굴 카이미쉬는 섭정을 맡으며 오고타이계 인물이 칸이 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투는 유럽 원정 시절 친교를 다졌던 톨루이의 아들 몽케에 호감을 가지고있었고, 톨루이계와 동맹,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몽케를 대칸으로 옹립했다. 오고타이계와 차가타이계는 반발했지만, 톨루이, 바투 연합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몽케에게 제압되었다. 몽케는 차가타이의 손자이며 유럽 원정에서 바투에게 반항했던 부리를 바투에게 넘겼고 바투는 그를 죽였다.

File:Bat Khan.JPG

 - "승리자는 바로 나라네. 구유크" -

 이런 일련의 상황은 바투의 힘을 강화시켰다. 바투는 대칸의 옹립자로써 제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당시 몽골을 방문했던 루브룩은 몽케와 바투의 권세가 온 지구를 덮었다고 했으며, 바투의 부하들은 뭉케에게 공손하게 대우받았다고 전해진다. 바투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서는 칸이나 다름없었고, 확실히 그는 유럽인들에게 몽골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 비춰졌다. 다만 바투 자신은 몽골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뭉케에게 여전히 호의적으로 자신의 장남 사르탁을 뭉케에게 입조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르탁이 뭉케에게 입조해있던 1255년. 바투는 4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 뒤는 서둘러 귀환한 사르탁이 뒤를 이었다.

(1) 사실 호라즘 제국은 막 급성장한 제국이라 내부가 엉망인데다가 오트라르 영주는 무하마드의 동생이자, 동시에 무하마드 어머니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무하마드로써는 처벌하고 싶었다고 해도 처벌하기 힘들었다.

(2) 몇 년 후 이 곳을 지나간 카르피니는 키예프에 몇 채의 오두막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과장을 좀 섞으면 한때 콘스탄티노플 수준의 부를 자랑했던 키예프의 처참한 몰락이었다.

(3) 하지만 다니엘로 대공은 결국 몇 년 후 바투에게 항복했다. 그는 나중에 루스의 왕을 칭하기도 했다.

(4) 보통은 헨리로 알려져있지만 헨리는 영어식 발음. 일단 헨리크란 발음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앙리 3세가 폴란드 왕 시절 귀족들한테 약속했던 헨리크 조항때문에 헨리의 폴란드식 발음을 헨리크로 판단하고 적었다. 당시까지 슐레지엔은 일단 폴란드 소속이었으므로 독일식 발음인 하인리히가 아닌 헨리크로 표기하는 바이다.

(5) 사실 튜튼기사단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거나 아예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튜튼기사단은 직후 프로이센에 대한 공세를 재개한 것으로 보아 피해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튜튼기사단에게 큰 피해를 준 전투는 이듬해 노보고로드 공국과 겨루었던 페이푸스 호수 전투였다. 이 전투 이후 프로이센에서 대규모 반란이 벌어졌다.

(6) 정작 쿠만족은 헝가리 왕실 및 귀족들과 불화를 일으키고, 헝가리를 한바탕 뒤엎고 사라진 뒤였다. 쿠만족은 이후 헝가리와 화해하고 다시 복귀했지만 이는 몽골군이 후퇴한 뒤의 일이었다.

(7)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바투는 회의장에서 수부타이한테 너무 늦었다고 따졌지만 수부타이가 바투가 사고친 것이 문제 아니었냐며 반박하자 수긍하고 사과했다.

(8) 이는 구유크에게는 다행이었다.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가 이 때 불온한 의도를 가지고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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